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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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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1945년 광복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회담은 결렬되고 정부 수립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통일안이 가결되었으나 소련의 반대로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였다.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해 온 결과가 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반도에 최초로 수립된 민주공화국. 1948년 8월 15일부터 1960년 6월 15일까지 존속하였다.
반공주의가 주요 국가 정책이었고, 이를 빌미로 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경찰 및 우익단체와 결탁하여 여러 학살을 벌였고, 좌익 세력들이 빨갱이로 몰려 탄압당하기도 했다. 대북정책으로 북진통일을 시도하였고, 6.25 전쟁 중인 1950년 10~11월에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결국 전쟁이 서로 물고 물리는 교착상태에 빠진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북진통일에 실패하고 다시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8]
이후 이승만 정권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했으나 이반된 민심이 들고 일어나면서 4.19 혁명이 벌어졌고,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제1공화국은 멸망하였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들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함과 동시에 가장 넓은 영토를 잃기도 한 체제이다. 6.25 전쟁 중 북한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어선 안쪽과 제주도, 일부 도서 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되었다가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초산, 혜산, 청진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다시 삼팔선 부근으로 밀려났고 전쟁이 휴전으로 끝남과 동시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철원, 속초, 설악산 등을 차지한 반면 개성, 연백, 옹진반도 등을 잃었다. 이 상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2. 한반도 내 최초의 공화헌정체제 수립[편집]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서 멸망한 이후 1919년까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의 주류는 복벽주의라고 불리는 왕정복고 운동이 주류였다. 그러나 3.1 운동이 일어나고 난 이후 독립운동의 주류는 공화주의로 급격하게 기울었고 그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 지금은 공화국이라는 일본식 번역어가 대중에게 자리잡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민국이라는 중국식 번역어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대한공화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를 접수한 미군정과 소련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무시했고,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한반도에 귀국했다. 임정 진영을 구성한 정당들은 한국독립당을 제외하고 하나둘씩 탈퇴하기 시작했고, 1946년 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정치단체(임시정부 국무위원회)로서 활동했지만, 김구와 김규식과 신익희의 과두제였으며, 김구 계파와 김규식 계파는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반대하면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참가를 거부한 덕택에 자연스럽게 한반도의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1948년 5월 10일의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선출한 제헌 국회는 이승만 계파와 신익희 계파의 협력에 힘입어 7월 12일에 입법한 제헌 헌법을 7월 17일에 정식으로 공포했다. 7월 20일에 간선제로 제1대 대통령 선거를 실행하면서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뽑았고, 8월 15일에 광복 3주년을 기념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제헌 헌법을 입법할 때에 이승만은 임정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전문에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구를 넣었고, 3.1운동의 헌법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 다스리는 제1공화국을 세웠다.
3. 관련 인물[편집]
3.1. 정부 및 여당 관련 인물[편집]
- 곽영주
- 김도연
- 김동성
- 김마리아
- 김백일
- 김영삼
- 김정렬
- 김종원
- 김창룡
- 김활란
- 노덕술
- 모윤숙
- 박마리아
- 백선엽
- 백인엽
- 송요찬
- 신성모
- 안호상
- 원용덕
- 유재흥
- 유지광
- 유진오
- 윤치영
- 이강석
- 이기붕
- 이범석
- 이승만
- 이시영
- 이윤영
- 이인
- 이정재
- 이종찬
- 임영신
- 임화수
- 장택상
- 전진한
- 정인보
- 지청천
- 채병덕
- 최덕신
- 최인규
- 탁성록
- 프란체스카 도너
- 함태영
- 허정
3.2. 야당 관련 인물[편집]
4. 관련 사건[편집]
- 우키시마호 사건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제헌 헌법 제정
-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제주 4.3 사건[9]
- 제1대 대통령 선거
- 국회 프락치 사건
- 백범 김구 암살 사건
- 청년방위대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대통령 직선제
- 농지개혁법
- 6.25 전쟁
-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 제2대 대통령 선거
- 단성사 저격 사건
-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
- 제3대 대통령 선거
-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 경향신문 폐간 사건
- 가짜 이강석 사건
- 닭죽 사건
- 경무대 똥통 사건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 충정로 도끼 사건
- 신국가보안법 제정(보안법 파동)
- 진보당 사건
-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5. 미디어에서[편집]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중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드라마가 야인시대인데, 최근에 들어서 심영물의 대상이 점점 많아지면서 제1공화국 자체가 합성물의 소재가 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야인시대 합성물 중 최근에 부상하는 인물이 바로 제1공화국의 수장 이승만. 뿐만 아니라 이기붕, 조병옥 등의 당시 정치인들이 개성을 가진 캐릭터로 부상하고 있다.
야인시대 바로 전에 편성된 SBS 대하사극 여인천하의 원작인 월탄 박종화 선생의 소설 <여인천하>의 소재 역시 제1공화국으로, 박종화 선생이 프란체스카 도너, 모윤숙, 박마리아 같은 자들의 치마자락 정치를 조선시대의 문정왕후, 정난정, 경빈 박씨 등에 빗대어 쓴 것이다.
5.1. 동명의 드라마[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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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9년 10월 15일 이전 사괘의 배치가 달라지기 전의 국기
[2] 승계 여부에 논란 있다. 임정 법통 논란 참조.[3] 제1공화국 정부가 당시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하자로 인해 발행한 논란이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4] 출처[5] 1954년 11월15~17일 수복지구 행정권 이양식 이후 면적, 다만 국내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미등록토지를 제외한 면적이다. [6] 현수막에 적힌 한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7]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8] 만약 6.25 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이루었다면 이승만과 1공화국의 위상은 지금과는 180도 다른 엄청난 신격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승만이 거의 조지 워싱턴+에이브러햄 링컨 수준의 위인으로 대우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9] 시작은 미군정기이나 제1공화국 시절 사태가 종료되었다.
[2] 승계 여부에 논란 있다. 임정 법통 논란 참조.[3] 제1공화국 정부가 당시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하자로 인해 발행한 논란이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4] 출처[5] 1954년 11월15~17일 수복지구 행정권 이양식 이후 면적, 다만 국내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미등록토지를 제외한 면적이다. [6] 현수막에 적힌 한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7]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8] 만약 6.25 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이루었다면 이승만과 1공화국의 위상은 지금과는 180도 다른 엄청난 신격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승만이 거의 조지 워싱턴+에이브러햄 링컨 수준의 위인으로 대우받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9] 시작은 미군정기이나 제1공화국 시절 사태가 종료되었다.